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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회의 === 강화 회의는 1963년 9월 16일 오로아 연방회관에서 열렸다. 교전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델라웨어가 자국의 랜드해협 식민정부 소재지를 회의 장소로 내놓았고, 델라웨어 외무장관 카를 하인리히 베어발트가 의장을 맡았다. 협상국 대표는 플로렌시아의 앙드레 뒤몽 총리였다. 루이나 대표단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특명전권대사 에드윈 C. 할로웨이가, 사비에트 대표단은 외무장관 유리 세메노프가 이끌었다. 회의는 본회의 아래 영토·배상·군비·해협의 4개 위원회를 두고 진행되었다. 영토 문제에서는 협상국 내부의 이견이 먼저 불거졌다. 플로렌시아는 체르드와의 국경 지대를, 웨스타시아는 라 마베라와의 국경 지대를 얻으려 했다. 루이나는 영토를 바꾸면 점령지 통치와 반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했고, 무엇보다 사비에트의 핵실험 이후 확전 위험을 경계했다. 결국 루이나의 안이 채택되었고, 플로렌시아와 웨스타시아는 배상과 군비 제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해협 위원회에서 사비에트는 1957년 해협 항행 규칙의 완전한 철폐를 요구했고, 협상국은 군함 사전 통보제만은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양측은 상선의 자유 통항을 명문화하는 대신 군함 사전 통보제를 유지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는 해협의 주권국으로서 회의 참가를 요구했으나,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협상국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비에트도 이 요구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회의가 가장 오래 멈춘 곳은 사비에트 해군의 제한 문제였다. 통상파괴전으로 상선 수백 척을 잃은 협상국, 특히 루이나 해군은 사비에트 잠수함에도 상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비에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1월 중순에는 사비에트 대표단이 철수를 시사하면서 회의가 결렬 직전까지 갔다. 11월 하순 할로웨이와 세메노프의 비공식 접촉을 거쳐 루이나가 잠수함 제한 요구를 거두면서 교착이 풀렸다. 당시에는 사비에트의 거부에 협상국이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양보가 두 나라 사이의 비밀 양해와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은 30년 뒤에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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